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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ich/배우고 싶은 사람들

근대 여성교육운동의 선각자, 차미리사

by 현현. 2022.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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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수레 두 바퀴와 같은 남녀의 관계가 안쪽으로
기울어졌으니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남자의 덧붙이가 되지말고
스스로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 차미리사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 ~ 1955) 

시대의 굴레와 억압을 벗어 던진 여성독립운동가이자 근대 여성교육운동의 선각자

 

 


차미리사 어린 시절

 

차미리사는 제대로 된 이름하나 없이 ‘섭섭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차미리사 선생은 스물 셋의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1901). 이때 남겨두고 온 어린 딸과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외국어를 배우며 고학하느라 심신이 지쳐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중국 유학을 마친 차미리사 선생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1905),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 발기인이 되었다(1907). 이것이 그의 첫 국권 회복운동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교육 운동, 사회활동, 독립운동, 언론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친 차미리사는 미주리주 캔사스에 있던 스캐리트 성경학교(The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입학하였다(1910). 학업을 마친 후, “외국에 있느니 보다는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동지들과 손을 잡고 직접으로 사회의 일도 하며 청년 여성을 교육시키어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귀국하였다(1912). 조국을 떠난 지 10여 년만으로 그의 나이 서른 네 살 되는 해였다.


전국순회 조선여자교육회를 이끌어 간 리더

"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라 "


1921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못배우고 괄시받던 조선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인 ‘조선여자교육회’의 ‘전조선순회강연단’의 강연은 마치 100년 전 지식콘서트와 같았다. 음악과 강연으로 빈틈없이 잘 짜인 한편의 종합문화공연을 선보인 이 강연은 여자들만으로 구성, 무려 84일간 67개 고을을 방문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지금도 쉽지 않은 강연단의 일정은 민중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당시 신문에 거의 전 일정이 대서특필 될 정도로 여성들은 물론 전조선이 주목할만큼 성공적이었다. 강연단을 진두지휘하고 청중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멋들어지게 영어 노래를 부르던 사람, 역사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미리사’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그녀는 사실 100년전, 당대의 셀럽이었다.

차미리사선생이 이끈 조선여자교육회의 순회 강연회는 전국 수만명의 여성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여성이 바로 한국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 약 천여명이 모여들었던 해주에서의 강연,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가는 차미리사에게 크게 영향받은 최은희기자는 훗날 차미리사 사후 평전을 집필하고 이를 위해 차미리사의 마지막을 육성으로 녹음했다. 방송에서는 차미리사 선생의 마지막 육성 녹음을 통해 그녀의 살아있는 의지와 열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3XHbi9xAWM 


덕성여자대학교 전신 '근화여학교' 설립자

 

3.1정신으로 창학한 근화여학교, 1930년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 참가 전국을 돌며 여성들의 생활 개조, 신문화, 신사상을 전파한 조선여자교육회는 후일 ‘근화여학교’로 발전했다. 덕성여고와 덕성여대의 전신인 ‘근화여학교’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특히 강조하며 실용적 교육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운동가와 독립운동가를 낳으며 근대 여성인재 배출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특히 근화여학교는 1930년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에 3학년을 제외한 153명 전원이 참가했고 이중 21명에게는 2019년 독립유공자 훈장이 추서되었는데 그 뒤에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도전의식을 강조한 차미리사 선생이 있었다.

 


우리나라 1세대 대표 신여성 ‘미리사’ 미국 유학, 미주 한인 여성 지도자

 

을사늑약이 있었던 1905년 중국을 거쳐 미국 유학에 도착한 차미리사는 망국의 위기 앞에 학업보다는 교육운동, 사회사업, 국권회복운동 등에 치중했다. 미주지역 애국지사들과 함께 항일단체인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에 적극 참여했다. 1908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부인회를 창립, 회장을 맡았다. 한국부인회는 최초의 재미 한인여성단체였다. 미리사는 어느덧 재미 한인사회의 여성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잊혀진 여성독립운동가

기억과 기록의 복원 3.1운동 시기 수많은 여성들의 목숨을 건 참여와 희생이 있었지만 역사의 기록과 평가는 언제나 남성 중심이었다. 여성의 각성과 교육이 국권 회복의 동력이 됨을 깨달은 차미리사 선생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이후 근화여학교를 설립, 근대적 여성 교육의 기틀을 닦았다. 하지만 평생을 여성 교육과 여성 독립에 바친 선생의 삶은, 아쉽게도 선생이 남긴 민족적 역사적 유산에 비해 후대에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 정부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것도 2002년으로 적잖이 뒤늦은 감이 있다.

 

차미리사는 안온한 삶을 포기하고 왜 여성교육, 여성독립의 길로 나갔을까. 무엇이 암흑과 절망 속에서 그녀에게 용기를 준 것일까. 2021년을 살아가는 여성이 100년 전 차미리사에게 질문을 던진다. 20세기 초의 신여성 차미리사의 삶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출처: 다큐ON “3.1운동기념- 미리사, 운명의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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