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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ich/배우고 싶은 사람들

<극락왕생> 고사리박사 작가 인터뷰 -딜리헙

by 현현.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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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트위터 눈팅하다가 '으아아악여성서사'라는 단어를 보고 식겁했다. 여성서사를 이렇게 유행처럼 소비하고 '질린다'는 듯이 말하는 것에 사실 마상을 입어... 고사리박사 작가님 인터뷰를 끌올해본다. 극락왕생은 클래식이 될 것임에 분명하지만, 특히나 이 인터뷰가 너무 좋아서 처음 읽은 당시에 인쇄까지 해놓고 보관중이다. 이상 고사리연구원의 서론이었다.



 

서로의 빈곳을 채워주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파트너, 그리고 그들 앞에 펼쳐진 위험천만하지만 동시에 흥분되는 모험들… 흥미진진한 성장물의 공식인데요. 하지만 지금까지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얼마나 있었을까요? 첫 시간에 다룰 딜리헙의 화제작 <극락왕생>은 바로 어제의 세계처럼 생생한 배경 안에서 펼쳐지는 한국적 판타지와 그 안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극락왕생>의 작가 고사리박사님을 만나 <극락왕생>이 만들어진 과정과 작품 안팎에 담긴 작가님의 생각들을 들어봤습니다.

D. 안녕하세요. 작가님,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딜리헙에서 <극락왕생>을 연재하고 있는 고사리 박사입니다. 반갑습니다.

 

D. 현재 연재 중이신 <극락왕생>에 대해 소개해주시겠어요?

<극락왕생>은 지나간 삶으로 회귀한 주인공 자언이와 그런 자언의 극락왕생을 도와야만 하는 지옥의 호법신 도명존자의 이야기입니다. 2011년의 부산을 배경으로 두 사람은 파트너가 되어 일상 속의 기묘한 사건을 해결하게 됩니다.

 

D. <극락왕생>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요?

불교 미술을 학문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불교에 나오는 다양한 부처와 보살, 경전에 나오는 인물들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복식과 도구, 역할, 그에 얽힌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세계관에 빠져들었죠. 그 세계관으로 꼭 만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D. <극락왕생>에 나오는 주인공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만화를 공개한 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자언이가 착해서 멋지다’ 였어요.

자언이가 왜 착해서 멋진가를 생각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그 악이 우리들의 안에도 있다고 말하죠. 진짜 악은 대단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스스로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는 게으름일 뿐이라고요.

 

극락왕생의 귀신들은 그런 존재예요. 그들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그만두고 행동하기 전 의심하는 것을 잊어버린 존재들입니다. 자언이는 그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져요. 방법이 정말로 그것밖에 없을까? 꼭 그렇게 해야 할까? 그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려고 해요. 그게 자언이가 가지고 있는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용기가 자언이를 선한 인물로 만들어요. 악은 전혀 멋지지도 강력하지도 않죠. 진실로 대단한 건 모든 이가 당연하게 넘기는 일에 의심을 가지고 더 나은 방도를 꿈꾸는 선이에요.

 

반면에 도명존자는 상당히 원칙주의적이고, 상명하복에 충실하고, 윗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캐릭터에요. 그런 점에서 자언이랑 반대되는 캐릭터인데, 도명존자의 특별한 점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 옳다고 생각하는 점을 보면 빨리 그것을 배워요. 2화에서 보면 자언이에게 ‘네 그런 점은 본받을만한 것 같다’고 바로 인정하잖아요?

D. 그것 또한 도명존자의 용기로군요.

네, 맞아요.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거 같아요.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면서 함께 나아갈 수 있지요. 아, 시나리오를 짜면서도 생각한 건데 얼핏 보기엔 도명이 상당히 완고해 보이지만, 고집이 더 센 쪽은 자언이 같아요. 자언이는 도명이 뭐라고 하든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더라고요. (웃음)

 

D. 작품 내에 독특한 귀신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어떻게 이런 귀신들을 만들어 내셨는지 궁금합니다.

곽재식 작가님이 쓰신 <한국 괴물 백과사전>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뼈대를 뽑아내서 살을 붙일 때도 있고, 어떤 귀신은 제가 일상 속에서 떠올리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일상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어요.

그런데 이런 귀신 자료를 찾아보면, 장애인 혐오나 여성 혐오가 없는 디자인을 찾기가 힘들어요. 사람들이 뭘 두려워하는지를 보면 뭘 혐오하는지도 보이는 것 같아요.

극락왕생이 아무래도 자언이의 지나간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인 만큼, 특정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잖아요? 제가 자언이와 같은 세대인데, 학창 시절에 00역 귀신에 대한 시리즈가 유행을 했어요. 움직이는 웹툰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와서 보는 사람을 놀래키는 시리즈인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까 좀 우스운 거예요. 대체 긴 머리카락의 젊은 여성이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요?

 

어떻게 보면 극락왕생은 그 00역 귀신의 이야기입니다. ‘박자언은 왜 당산역 귀신이 되었을까요?’ 1화에서 관음보살이 질문을 던지잖아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앞으로 천천히 찾아나갈 거예요.

 

D. 그래서 그런지, 극락왕생은 귀신 이야기지만 귀신들이 무섭다기보다는 짠한 것 같아요.

읽으시는 분께도 귀신이 별로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쟤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저런 귀신이 되었을까? 를 먼저 상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D. 회차의 마지막에 꼭 노래가 하나씩 들어가는데, 회차에 들어가는 음악은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노래는 스토리를 짜는 단계에서부터 아주 오래 고심해서 골라요. 해당 에피소드의 마지막을 장식할 때 가장 재미있고 효과적인 장치로 쓰일 만한 곡을 고르고 골라 선곡하는데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노래의 제목이나 가사부터, 그 노래가 가진 배경이나 시대적 상징성을 고려하며 고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극락왕생의 연재 주기는 3주잖아요? 3주는 한 편의 이야기가 완전히 잊히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그러니 이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이 이야기를 기억해주십사 하는 저의 호소이기도 합니다. (웃음)

D. 작가님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장면은 어떤 것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독자님들이 인상 깊게 봐주신 장면은 역시 2화의 ‘왜 좋은 건 다 잊어버릴까?’ 인 것 같아요.

진짜 사람들이 좋은 건 다 잊어버린단 말이에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정말 안타까운 건, 내일 일은 알 수 없고 오늘은 너무 힘들거든요, 그런데 어제 있었던 좋은 일은 변하지 않아요. 우리가 힘들 때마다 꺼내보며 위로받을 수 있는 건 바로 지난날에 일어난 좋은 일들이에요. 그러니 잊어선 안 돼요.

D. 여성들이 주역인 작품이다 보니 여성 서사와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여성 서사에 있어 작가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좋은 것은 잊어버린다.”라는 여성주의에서도 통한다고 생각해요.

여성주의를 공부하면서, 사회가 내게 강제한 여성성이라는 허물을 부수고 싶은 마음에 허리까지 길러온 머리를 짧게 잘랐어요. 어느 날인가 지하철에 앉아 사람들을 보면서 나 하나 이런다고 세상이 바뀔까 하는 의심을 잠깐 품었죠. 집에 돌아와서 우연히 세계불교여성대회에 발표된 논문을 하나 읽었는데, 불교 승가의 가부장적 위계조직을 비판하는 글이었어요. 과거의 불교 승가에서 여성 출가자는 전무하거나, 혹 소수 있더라도 남성 출가자들을 위해 음식공양과 세탁을 하는 데 그치곤 했거든요. 왜 남성 출가자는 여성 출가자를 그들과 동등한 위계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을까요?

 

출가자의 삶은 여성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유리한 영역이죠. 여성은 개인의 능력보다 외모로 판단되며, 여성성 자체가 사람들에 의해 보여지고 비판받는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당시에 출가를 결심한 여성들도 인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있어 출가는 더 이상 여성으로서의 퍼포먼스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어요. 남성 출가자들은 그래서 이들을 받아들이는 걸 못마땅해 했을 겁니다. 남성 출가자에게는 반대로 수도생활 자체가 또 다른 퍼포먼스였으니까요. 이러한 불교 내의 낡은 인식과 관습, 가부장적 위계조직을 없애고자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비구니스님들의 투쟁을 보면서 저는 오늘날 여성들의 탈코르셋 운동을 봤어요. 그 계보를 인지하는 순간, 사람에 대한 믿음이 차오릅니다. 바꿔왔고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요. 

 

이 믿음은 정말로 중요해요. 이런 믿음이 없으면 오랫동안 버티면서 나아갈 수가 없죠. 불신만 해서는 뭔가를 바꿀 수 없어요. 앞으로도 세상은 바뀔 거고 바뀌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의 좋은 일들을 생각하고 그것을 계속 계승해 나가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이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다음 세대의 여자아이들에게 이 계보를 알리고, 낡은 인습에 익숙한 무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여성 서사 창작물을 만드는 일은 저 같은 여성주의 창작자들이 가장 잘 할 수 있겠지요. 여성주의자로서 창작활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반드시 그런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과거를 회복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요.

 

D. 좀 더 여성 서사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여성 서사를 그리시는 창작자로서, 하고 싶으신 말씀을 더 들어보고 싶어요.

일단 제가 여성 서사를 그리고 있는 작가로서 목표하는 것은 억울해 하지 않는 거예요.

여성주의적 작품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여성주의적 비평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 비평이 너무나도 혹독해서 비난으로 느껴질 때도 있죠. 그러나 여성 해방이 결국 여성에 의해서 이루질 것이듯이 완벽한 여성주의 서사 또한 여성이 만들게 될 거예요.

 

3화에서 도명이가 자언이에게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하는 물음을 던지지요. 근래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는 질문 또한 그것이에요. 다른 작가는 여성 혐오적인 작품을 하면서도 잘 나가기만 하지만, 나는 가난하게 여성주의적인 작품을 만들면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비평 받는 일은 분명히 고되고 서럽고 지칠 거예요. 그래서 굳센 다짐이 필요합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해요.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죠.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을 연재하는 작가로서의 마음입니다. 저 또한 여성주의 작품을 읽는 독자로서 생각해 보자면 독자들에게는 작품을 어떻게 비평할 것이냐 하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D. 그럼 독자로서의 이야기를 해봐요. SNS나 덧글 때문에 독자들과 작가의 거리가 좁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작가들에게 작은 비난도 무겁게 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비평이란 전문성이 필요한 일인데, 지금은 젊은 여성주의 평론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에요. 따라서 읽고 있는 독자들끼리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봐요.

 

D. 그럼 여성주의 작품을 읽는 독자분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점이 있다면 뭘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과거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독자분들이 잊으셔서는 안될 것이, 워낙 여성주의에 대한 생각이 빠르게 발전하고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다 보니, 지금에 와서 부족해 보이는 과거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의 작품은 누군가의 최선을 다한 현재였을 거예요. 분명 어떤 부분은 굉장히 여성 혐오적이었겠지만, 그 부분 때문에 작품 전체를 ‘빻았다.’는 한마디로 뭉뚱그려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좋은 걸 다 잊어버려서는 안 돼요. 서사는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줍니다. 예전 작품의 그 의미 있는 부분이 없었다면 제가 <극락왕생>이라는 작품을 할 수 없었겠죠. 마찬가지로 제가 최선을 다한 <극락왕생>이 미래에는 한계가 많은 작품으로 읽힐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작품은 미래의 여성주의 작품에 반드시 영향을 미칠 거예요. 우리의 작품 하나하나가 더 높은 목표로 가는 돌계단을 이루는 돌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멀리서 보면 정말 근사해요.

D. 너무 혹독한 완벽주의를 경계하는 게 좋겠죠.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없으니까요.

맞아요. 여성주의 작품에 대한 비평과 함께 그 작품의 ‘좋은 것’을 발견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해요.

 

D. 이런 생각으로 만드셔서 그런지, <극락왕생>은 미디어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순하게 묘사된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보이고 그래서 작품에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일단 만화 속의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흔히 말하는 이누야샤, 원나블(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세대인데 제 최애캐(최고로 애정 하는 캐릭터)는 늘 여성이었어요. 그런데 꼭 처음에는 멋진 캐릭터였던 여성 캐릭터들이, 뒤로 갈수록 남성 주인공의 멋진 전리품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요. 좋아하는 캐릭터가 활약을 덜 하게 되면 만화가 재미 없어지고. 그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니 나중에는 저도 자연스럽게 남성 캐릭터를 좋아하게 됐죠. 더 나아가서 남성 캐릭터만 나오는 이야기를 만들게 됐고요.

 

그런데 페미니즘을 접하고 생각해보니, 제 이야기 안의 남성 캐릭터들은 굳이 남성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굳이 표현하자면 ‘어떤 역할이든 맡을 수 있는 전능한 무성체’에 가까웠던 거예요. 그런 캐릭터들을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만 설정했던 이유는 여자가 주인공이면 재미가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제 안의 심각한 여성혐오 때문이었죠.

그것을 깨닫고 나서는 이야기를 짜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물론 읽는 방식도 바뀌었고요.

 

D. <극락왕생>의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은 그런 과정에서 탄생했군요.

주인공 자언이가 고등학생이다 보니 고등학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저도 부산의 여고를 나왔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건데,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여성이었던 당시의 경험이 정말 소중한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 있었던 그 자리 말이에요. 저는 그 감각을 계속 기억하고 싶어요.

그 작은 교실 안에 모든 인간 군상이 다 있었죠. 이 경험을 한 것은 저 뿐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작가들도 같은 경험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가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지금까지 보아온 미디어 때문이겠죠.

D. 그래도 근래에는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이 들죠.

트렌드가 많이 바뀌었죠. 3,4년 전이면 생각도 못 했을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럴 때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차오르는 기분이에요. 계속 좋은 것을 기억해야 해요. (웃음)

 

D. 본인의 작품을 통해 특별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관음보살은 불교에서 굉장히 인기 있는 신이에요. 체감상 제일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관음보살의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여성으로 그려진 건 아니거든요. 처음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관음보살은 팔자수염이 난 서방 왕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관음보살이 어떻게 완전히 여성의 모습으로 굳어졌을까요? 그 이유가 아주 흥미로워요. 바로 당나라 때 무측천이 권력을 잡기 위해 불교 경전을 이용했기 때문이에요. 측천무후는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인데,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에 불교 경전을 이용했거든요. 그 때문에 당시에 만들어진 불상은 대부분 중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여신의 지위가 현실 여성의 지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예요. 그리고 현실 여성의 지위는 여신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죠.

 

분명 아주 옛날, 원시 시대에는 모든 이가 여신을 숭배했거든요. 그 여신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탈바꿈하면서 여신들은 남신의 신실한 아내가 되거나 생명을 낳는 어머니로 강등되었습니다. 강등된 여신의 지위는 추락한 현실 여성의 지위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았어요.

 

D. 여신의 신상을 현대에서는 여성이 나오는 작품들로 해석할 수 있겠군요.

그렇죠. 빼앗긴 여신의 신화를, 여성의 이야기를 되찾아야 해요. 그리고 이런 일이야말로 저 같은 창작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죠.

 

D. 수많은 여성주의적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을 그리시며 어려웠던 부분은 없으셨나요?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플랫폼에서 연락을 받았을 때, 몇 번씩 미팅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상업적인 작품이 아니면 사업부에서 투자하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그게 절망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현재의 업계는 하나의 길로만 작가들을 가게 하고 다른 길로 가면 안 된다고 강제하는 면이 많아요.

이런 상황에 갇혀있다 보니, 이제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이 길로 가면 정말 성공하지 못할까? 정말 안되는 길일까? 그리고 계속 궁금해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번 해봐야죠.

 

D. 현재의 웹툰 플랫폼과 웹툰 업계에 안타까운 점이 많으셨겠어요.

플랫폼들에서는 당장의 수익과 클릭을 유도하는 작품을 주로 찾는데, 독자로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커요. 저는 만화를 그리기도 하지만,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수익성이 높은 작품과 장르만을 쫓다가, 만화가 할 수 있는 다른 좋은 점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요.

 

우리는 만화를 클릭하는 하나하나의 조회 수가 그저 숫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페이지를 끄고 나서도,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살아가야 할 텐데, 시간을 들여 뭔가를 읽었다면 적어도 읽은 후의 삶이 읽기 전의 삶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져야겠죠. 그게 제가 창작자로서 작품에 느끼는 책임감이에요.

D. 여성 창작자로서, 그리고 여성주의 작품을 하고 있는 창작자들이 현재 업계에서 부딪히고 있는 차별의 벽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직도 도덕적인 내용의 작품은 재미가 없다는 편견이 있죠. 이건 정말 게으른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제 지인의 경우에는 피부가 어두운 여성 캐릭터를 디자인해갔다가, 이런 캐릭터는 인기가 없을 거라고 피부를 하얗게 만들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잘 팔리는 콘텐츠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이 있는 거죠.

 

D. 그런 고정관념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거군요.

네 맞아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품을 그리는 데는 어떤 대단한 작가적 마인드나 대단한 도덕적 마인드가 필요한 것도 아니거든요. 세상의 흐름이 바뀌고 있고, 자본주의적인 영리함만 있어도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D. 어떤 곳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품을 싣는 데에 대한 잡음을 아예 없애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결국 무엇이 옳은 일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데, 그 생각을 하기 귀찮은 것이죠. 스스로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으면 게으른 악이 될 뿐인데 말이에요.

 

D. 그렇다면 작가님께서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된 후, 창작활동과 관련하여 지금은 더 신경 쓰거나 혹은 달라진 부분들이 있나요?

사실 <극락왕생>에는 여성 캐릭터만 나오는데, 그것은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신경을 쓰지 않고 그리는 겁니다. 더 신경 쓰는 것은 오히려 남성 캐릭터에요. 캐릭터가 남성이어야 할 이유가 없으면 남성 캐릭터로 만들지 않아요.

남성 캐릭터는 아무래도 이목을 모으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남성 캐릭터가 나오는 순간 작품 전체의 독해가 뒤틀릴 우려가 있습니다. 제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아는 만큼 조심하려고 해요.

 

D.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으신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제 딜리헙 메인에도 걸려 있는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라는 문구는 <이상한 정상가족>이라는 책의 표제에요. 저는 이 책을 한국에서 자란 한국 여성이라면 꼭 읽어봤으면 좋겠어요. 가부장적 공동체가 어떻게 우리를 억압하는지, 이 사회에서 우리가 자율적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처음으로 고민하게 해준 책입니다. 제 삶의 목표도 이 책으로 인해 많이 바뀌었어요.

 

D. <극락왕생>을 연재하실 곳으로 플랫폼이 아닌 딜리헙에 독립적 연재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특히 딜리헙을 고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선 대기업의 자본 없이, 독립 만화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그렇게 해서 잘 된 선례를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잘 돼서 새로운 선례가 되면 저 이후의 작가들에게는 선택지가 늘어날 테니까요.

그중에서도 딜리헙을 선택하게 된 건, 일단 메인의 고양이가 귀엽고요. (웃음) 딜리헙이 느리지만 확실한 걸음으로 가겠다고 말씀하신 게 제게는 참 신뢰를 주었습니다.

 

D.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를 읽으시는 분들께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오늘 가장 많이 한 얘기가 좋은 걸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모두가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의 슬픈 것들만 골라서 기억하게 되는 이유는 슬픈 일을 계기로 내 삶을 영원히 바꿀 만한 중요한 선택을 내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작년에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극락왕생>을 그릴 수 있었거든요.

 

오늘 공교롭게도 인터뷰 장소가 합정이었던지라, 자언이가 있었던 당산과 합정 구간을 지나왔어요. 지하철 안에서 지난날을 떠올리니 기분이 새로웠습니다.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는 제가 그걸 계기로 <극락왕생>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딜리헙과 인터뷰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러니 지금 슬픈 일을 겪고 계신 분들께, 힘내라는 말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계속 살아가시길 바라요. 좋은 걸 기억하고 같이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요. 마음의 회복은 과거로부터 오니까요.


웹툰 《극락왕생》(2018년)
: 2019년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수상
불교의 윤회사상을 서사의 기본 구조로 삼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불보살의 자비로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를 다시 살게 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을 그렸는데, 동양적 세계관에 기초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철학적 사유, 완성도 높은 그림에 근거해 ‘대한민국 만화의 새로운 정통’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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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박사 작가 – 딜리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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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왕생

불보살의 자비 아래 되살아난 박자언은 지옥의 호법신 도명 존자와 함께 일상 속의 기묘한 사건을 해결한다. 윤회의 끝, 극락왕생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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